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의 사실을 전하는 ≪삼국지≫ 부여전에 의하면, 당시 부여시대의 법이 엄하여서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도둑질한 자는 12배를 배상하도록 하였다.
만약 배상할 수 없는 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나, 고조선 사회의 경우로 미루어보아 노비로 삼았으리라고 여겨진다. 이 법은 감옥 · 군대 · 관료조직 등과 함께 당시 부여사회의 사유재산제를 보장하고 그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주요한 권력장치의 하나였다.
살인자는 죽인다는 식의 형벌은 초기계급사회에서 보이는 응보주의적(應報主義的)인 면을 이은 것이다. 부여의 법은 아마도 성문법적(成文法的)인 형태는 아니고, 전대 이래의 관습법적인 것을 보완해 나갔던 형태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