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두는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서 평양 장로교계 3·1운동을 주동했던 목사이다. 1938년 8월경에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 참배 결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까지 건너가 활동했으나, 일제 경찰의 사전 검속으로 무산되었다.
김선두는 1876년 8월 4일 평안남도 평양(平壤)에서 태어났다. 1902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하여 1907년에 졸업하고, 같은 해 숭실사범 강습과를 수료하여 1913년까지 모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동시에 김선두는 1910년 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1913년 졸업하였다.
김선두는 1913년 6월 목사 안수를 받고 자신이 장로로 시무하던 평양 서문외교회목사로 부임하여 1922년까지 담임하였다. 1915부터 1917년까지는 숭실대학 강사를 겸했다. 1914년 6월 평양노회장에 피선되었고, 1918년 8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선임되었다.
김선두는 1919년 3월 1일숭덕학교(崇德學校)교정에서 열린 평양 장로교 계열의 광무황제 봉도식과 독립 선언식에서 사회를 맡았다. 사회자로서 그는 봉도식 축복 기도를 마친 후 성서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로마서 9장 3절을 봉독한 후, “구속되어 천년을 살기보다는 자유를 얻어 100년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여 군중을 열광시켰다. 이 일로 인해 김선두는 3월 2일 새벽에 만세 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1919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김선두는 즉시 불복 항소하였으나,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1년 2개월을 선고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당시 장로회 총회는 매해 9월 초순경에 개최되었으나 1919년에는3·1운동여파로 한 달이나 늦은 10월 4일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열렸다.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복역 중이었으므로 부회장인 마펫[麻布三悅] 선교사가 회의를 주재하였다. 김선두는 1920년 4월 30일 만기로 출소하여 목회 활동을 계속하면서 장로회신학교 강사로도 출강하였다. 1924부터 1933년까지는 평양 신암교회를 담임하였고, 1926~1928년에는 선천 신성중학교 교장을 겸했다. 이후 1930년에는 평양노회장에 재선되었고, 1933부터 1937년까지는 함경북도 성진(城津)의 욱정교회를 담임하였다.
김선두는 1938년 8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를 앞두고 일본 기독교계의 협조를 얻어 신사참배 결의를 저지시키고자, 일본 유학생으로 있다가 잠시 귀국한 김두영(金斗英)과 일본으로 건너갔다.궁내부'대신 · 제국 회의 의원 · 일본 육군 대장 등을 찾아가 한국교회가 당면한 어려운 입장을 호소하고 그들과 함께 돌아와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 총독을 면담한 결과 총회가 거부하면 신사참배를 더 이상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것을 총대들에게 알리기 위해 총회가 개최되던 평양으로 가던 중 열차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개성경찰서에 수감되어 무산되었다. 경찰서에서 석방된 후 곧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신학교(奉天神學校)에서박형룡(朴亨龍) · 박윤선(朴允善)등과 함께 신학교육에 전념하였다.
김선두는 광복 후 1946년 월남하였으나, 지병으로 1949년 10월 14일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김선두의 장례는 10월 17일 신도연합회 주최로 치러졌으며, 망우리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2007년 김선두에게건국훈장애족장이 추서되었다.